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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막 독일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어떤 한국사람이 독일에 온지 10년이 되었다고 하길래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어떻게 외국에서 10년이나 죽지 않고 살 수 있지?"
그 후로 50년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죽지 않았고, 독일 흉을 적당히 보면서, 그렇다고 해서 한국을 사무치게 그리워하지도 않으며 늙어가고 있다. 한창 왕성하게 일할 때는 영원히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던 은퇴도 했다.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노년에 대한 상상을 하다보니 어느새 호기심 나고 기대되어 1년이나 앞당겨 은퇴했다.
은퇴하고 보니 정말 새 세상이 열렸다. 독서, 바느질, 산책, 봉사활동 등 돈 안 들이고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일이 널리고 널린 일상이 행복하다. 여행과 문화활동을 비수기를 이용해 저렴하고 한적하게 즐길 수 있는 자유가 감사하다. 무엇보다도 큰 선물은 내게 주어진 시간이다. 늘 자신 없었던 컴퓨터나 영어는 이제 시간이 많으니 그까짓 거 유튜브로 배우면 되지 싶어서 배우기 전부터 미리 자신만만해지곤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순간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맘껏 해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황송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심지어 욕실 하수구 청소까지 정성껏 하고 있다.
인생에서 이런 황금기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독일에 온지 어느새 50년이 흘렀으니 앞으로 10년, 20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갈 것이다. 10년, 2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일까 혼자서 상상해본다. 내가 만약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혼자일까, 남편과 함께일까? 남편이 아플까, 내가 아플까? 집에 살고 있을까, 양로원이나 노인병원에 살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궁금한 점: 나는 독일에 살고 있을까, 한국에 살고 있을까?
어느 봄날, 달래 냉이 씀바귀로 차린 실버타운 영양밥상 유튜브 동영상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내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먼저 죽고 내가 양로원이나 노인병원에 들어가야 된다면 난 독일보단 한국에 있는 시설에 들어가고 싶을 것 같아. 그러면 하루에 세 번 식사시간이라도 기다려지지 않을까? 사람이 밥 먹는 낙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그래, 그게 가능하다면 당신한텐 좋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한국으로 이주하면 당신 의료보험은 어떻게 되나? 연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건 지금 나도 모르지."
"(버럭하며) 그것부터 알아봐야지.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간대?"
"아유 귀 따거. 지금'은' 모른대잖아? 나중에 갈 때 되서 알아보면 되는 걸 가지고 괜히 벌써부터 욕하고 그래, 엉?"
"(눈이 세모가 되어 삿대질까지 하며) 당신 그러다가 평생 쌓은 보험, 연금 다 날려먹어."
남편이 범하는 이 정도 무례는 홀로 남겨질 마누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갸륵하게 봐주기로 하자.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 대화가 몇번 오간 이후 나 스스로가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미리부터 슬슬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알아보지 못한 의료보험과 연금이 걱정되어... (나 혹시 가스라이팅...?)
나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 생활을 꿈꾼다. 소소한 도움과 가벼운 교류가 점점 요긴해지는 노년을 맞아 더욱 그렇다. 낯을 좀 가리는데다가 전형적인 도시 깍쟁이인 나는 각 가족마다 독립된 주거공간이 있는 느슨한 공동체를 선호한다. 여러 가족이 한 건물 안에서 따로따로 사는 공동주택이면 좋겠다.
이웃에 마음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끔 가서 얘기를 들어주고, 급한 일이 생긴 젊은댁 아이를 봐주며, 내가 아플 땐 이웃에게 시장을 봐달라고 쉽게 부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심신이 노곤한 어느 날, 껌딱지 남편이 나에게 자전거 타러 가자고 조르는 대신 이웃집 남자와 함께 나간다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 집 아낙과 차 한잔 함께하는 여유를 즐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젊어서는 독박육아, 늙어서는 독박시중을 하느라 고단한 인생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쉼터가 될 것이다. 주거공동체를 넘어 생활공동체가 될 것이다.
나는 보행기를 밀거나 휠체어를 타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집으로 이사 가는 꿈을 꾼다. 날로 깜빡거리는 기억력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짐을 확 줄여서. 우리가 가진 모든 물건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 우리 집이면 좋겠다. 노인성 건망증이 웬만큼 진행되어도 안경이나 휴대폰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사는 일이 그리 버겁지 않을 것이다. 수저 두 쌍, 접시 두 개씩만 있는 작은 집에 살지만 자식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며칠씩 묵으러 와도 걱정이 없고, 손님들을 많이 초대해도 접대할 방법이 있다. 그 건물 안에는 공동체 부엌과 거실이 널찍하게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크게 다투고 코딱지만 한 집 안에서 얼굴 맞대기가 짜증스러운 어느 날 저녁, 나는 이불을 말아들고 공동체 거실로 향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싸웠다는 걸 안 이웃 아낙들이 하나 둘씩 몰려와서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을 향한 성토대회를 벌일 것이다. 그러다가 눈물까지 흘려가며 접시가 깨지도록 웃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집에는 홀로 남겨진 모든 남편들이 몰려들어 정치나 기후변화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을 벌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지면 남편들이 아내를 데리고 자기들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아까 자지러지게 웃느라고 우리가 부부싸움 중이라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채 푼수마누라답게 다정하게 남편 손을 잡고서 우리 스위트홈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다. 생활공동체를 넘어 인생공동체가 된 그곳에서 우리는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 동화같은 이야기는 동화로 그칠 수밖에 없다. 공동주택 건물을 마련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화같은 이야기를 동화로 그치게 할 수는 없다! 주거공동체는 건물 살 돈이 없어 못 이룬다 할지라도 생활공동체와 인생공동체는 돈 없이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가까이 사는 이웃이든 멀리 사는 친구든 서로 보살피며 사는 게 우리 인간이 가진 본성이 아니던가? 젊어서 바쁘게 사느라고 깜빡 잊고 있어서 그렇지.
아, 아니다! 우리가 젊어서 바쁘게 살았을 때도 깜빡 잊지 않고 시도했던 일이 하나 있다. '이웃사랑 모임'. 2005년 일이니 어쩜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연로한 한인 한 분이 뮌헨 외곽에 있는 양로원에서 외롭게 지내신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 한인회장님이 한국음식을 갖다드리며 돌봐드린 적이 있다. 독일인 가족이 있더라도 한국사람들끼리 도울 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프거나 힘들 때 고향음식이 그리운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또한 치매에 걸리면 나중에 배운 제2 언어는 점차 잊어버리고 모국어로만 소통이 가능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도움을 같이 살고 있는 독일인 가족도 아니요 멀리 고국에 있는 친가족도 아닌, 같은 도시에 사는 한인들이 줄 수 있다니. 물보다 진한 것이 피라고 하지만 노년에 피보다 진한 것은 모국어와 김치란 뜻이다. 그것을 건네는 사람이 생면부지일지라도. (내가 쓴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과 나 사이에 피보다 진한 것이 교감한다는 사실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때 뮌헨 한인회가 중심이 되어 폭넓은 한인돌봄을 조직적으로 실현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뮌헨과 근교에 사는 한인 11명이 전화번호를 이용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11명이 차례대로 일주일에 한번씩 돌봐드리러 간다면, 돕는이 입장에선 석달에 한번씩만 봉사하는 셈이니 부담이 크지 않아 꾸준히 실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대기하고 있었으나 봉사를 실천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때는 연로하신 1세대가 별로 없었던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이라면 어떨지 모르겠다. 지금쯤 다시 시도해보기 좋은 꿈이 아닐까?
또 이런 꿈은 어떤가? 누구나 살다 보면 잠깐씩 조그만 도움이 필요할 때가 생긴다. 몸이 아파서 장 보러 갈 수 없을 때, 급한 일이 생겨 아이를 잠시 맡겨야 할 때, 파트너와 싸우고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갈 데가 없을 때.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선뜻 연락하기 어려운 건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이때 내가 속해 있는 품앗이클럽이나 돕자방에 무작정 사연을 적어 올리면 시간과 사정이 맞는 사람이 나타나 도와준다. 그리고 그 댓가로 내게서 도토리를 받아간다. 내 도토리는 내가 이전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받았던 것이다. 나도 사정이 좋아지면 누군가를 도와서 도토리를 다시 모아둬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필요할 때 또 도움받지. 하수선한 세월을 맞아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동화같은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생 황금기를 맞아 나는 이런 꿈을 꾸며 산다. 언제 갑자기 사라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으로 인해 얇은 얼음 조각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황금기에. 내가 돌봄을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상에 잘 쓰이기 바라는 마음으로.